'대화의 희열3' 박준영 재심 변호사 "솔직히 정의감보다 유명해지고 싶었다"
'대화의 희열3' 박준영 재심 변호사 "솔직히 정의감보다 유명해지고 싶었다"
  • 승인 2021.07.30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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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KBS 2TV '대화의 희열3' 방송캡처
사진= KBS 2TV '대화의 희열3' 방송캡처

박준영 변호사가 재심 전문 변호사가 되기까지 과정을 솔직히 털어놨다.

29일 방송된 KBS 2TV '대화의 희열3' 최종회에서는 법조계 아웃사이더 박준영 변호사가 마지막 게스트로 출연했다.

박준영 변호사는 재심 전문 변호사로, 영화 '재심'에서 정우 역할, '날아라 개천용'에서 권상우 역할의 모델이다.

박준영 변호사는 고졸 변호사로 법조계를 뒤훈들었다. 그는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난' 삶을 살았다. 그는 "도시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자랐을 것 같은 외모와 달리 섬 출신"이라며 어린 시절 이야기를 털어놨다.

박준영 변호사는 "아버지가 어린 시절 하는 것마다 말아드셨다. 장의사라는 가업을 물려받으셨다. 어렸을 때 누군가에게는 극심한 불행인데 사람이 죽었다는 전화가 정말 반가웠다"며 "사람이 죽어야지 저희는 장사가 됐다. 돌이켜 보면 부끄러운 생각이다. 생각해보면 장의사와 변호사는 비슷한 부분이 많다. 남의 불행을 먹고 산다. 아버지는 장의사로서 불행에 대한 배려가 각별했다. 목숨을 잃은 이들을 정성스럽게 대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직업적으로 사명감이 투철했지만 가정적인 남편이자 아빠는 아니었다. 박준영 변호사는 "아버지가 가정적으로 폭력과 음주를 일삼으셨다. 이런 좋지 않은 모습도 있다"며 가정 폭력을 당한 사실을 밝혀 놀라움을 안겼다.

이후 어머니가 중학교 2학년 때 29세의 나이에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방황이 시작됐다. 그는 "어머니의 불행한 삶에 대한 책임이 아버지에게 있다는 그런 생각이 사춘기와 맞물려 방황하기 시작했다"며 "광주로 유학을 갔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자퇴하고 가출한 뒤 인천과 서울을 떠돌며 봉제 공장과 나이트 클럽에서 웨이터를 했다. 나중에 아버지의 설득에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기 위해 다시 섬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박준영 변호사를 변화시킨 건 군대에서였다. 운전병을 배려하는 대대장의 모습에 '어른'의 모습에 대해 고민하게 됐고,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선임을 따라 무작정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 한자가 너무 많아서 하루에 열 몇 시간을 공부해도 20~30페이지 보기 힘들었다"며 "옥편을 찾아가면서 읽고 다음 페이지를 보면 이전에 공부했던 걸 잊어버렸다. 요약하는 법도 모르니까 접착식 메모지에 작은 글씨로 시험에 나올 것 같은 내용을 빼곡히 적었다. 나중에 노트 꺼내는데 도박판에서 카드패 꺼내는 것처럼 메모지를 꺼냈다. 강의도 녹음된 테이프를 샤워하면서, 밥 먹으면서, 자면서도 듣고 잤다. 유난스럽다고 하는데 난 합격이 목표였기 때문에 유난도 괜찮았다"고 말했다.

고시 공부를 하던 박준영 변호사는 "아버지가 사고사로 돌아가셨다"며 "굴삭기와 덤프트럭 사이에 몸이 끼였던 아버지는 외관상 문제가 없었지만 심장내 출혈이 발생했고 섬에 있는 병원이 원인을 찾지 못해 포도당 주사만 투여했다. 늦게 육지에 있는 병원에 가려고 했는데 헬기가 늦어서 못 뜨고 의료용 선박도 없어 고깃배를 타고 이동 중 배 위에서 하늘로 떠나시게 됐다"고 회상했다.

박준영은 "원인 파악도 못 한 채 헬기가 못 뜬다면 의료용 선박이라도 있어 응급처치라도 받고 갔다면 싶더라"며 "결국 공익 소송을 걸기로 했는데 고시생 신분이라서 무료 법률 상담 광고를 보고 변호사를 찾아갔다고 했다. 하지만 변호사가 이를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아 좌절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고시합격을 하고 고졸 변호사사 된 박준영 변호사에게는 아무도 일을 맡아주지 않았다. 성적이 밑바닥이었다. 그는 결국 국선 변호사를 하게 됐고 당시 수임료가 건당 20만 원에서 30만 원 사이였던 국선 형사사건을 한 달에 70건 정도 맡았다. 그러다가 박준영 변호사는 수원 노숙 소녀 사망사건을 맡게 되면서 재심 전문 변호사가 됐다고 말했다.

수원 노숙 청소년 사망 사건'은 수원의 한 고등학교에서 숨진 채 발견된 소녀에 노숙인 2명과 가출 청소년 5명이 범인으로 지목돼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사건.

박준영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실 귀찮았다"며 5명의 가출 청소년들을 돌봐주었던 경기도 청소년 복지센터 선생님과의 만남을 회상했다. 선생님들은 '모두가 우리를 나쁘게 생각하더라도 선생님만은 저희를 믿어주세요'라는 아이들의 편지에 소극적인 박준영을 대신해 사건의 자료를 정리하며 적극적으로 부탁했다고.

박준영은 "드디어 인생 사건을 만났구나"라고 생각하며 정의감보다는 유명해지기 위해 사건을 변호하게 됐다고 고백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는 "물론 불쌍해 보이긴 했다. 그래도 정의감은 없었다. 정의감으로 달려들었으면 최선의 변호를 했을 거다"며 "부담스러운 마음에 기존 검찰 수사를 지적하지 못하고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다. 굳이 적을 만들지는 말자고 생각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개인적인 욕심으로 달려들었던 사건이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자 충격을 받은 그는 그제야 억울한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박준영 변호사는 "내가 2심을 다시 맡겠다고 했을 때 아이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며 "변호를 실패한 자신에게 불평이나 항의도 없이 가만히 있는 모습에서 자신의 잘못을 느꼈다"고 말했다.

"힘없는 사람들의 조서는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고 주장한 박준영은 이수정 교수의 도움으로 집단 허위 자백의 사례를 찾아냈고 결국 5명의 청소년의 무죄 판결을 끌어냈다. 더불어 이미 형이 확정돼 복역 중이던 2명의 노숙인의 재심을 맡아 사건의 진실을 밝혔다.

[뉴스인사이드 강하루 기자 news@newsinsid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