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균의 Zoom-人] 기업인 특사(特使)

2025-07-19     정해균 기자
(왼쩍부터) 박용만 전 두산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송호성 기아 사장

한국 기업인들의 ‘민간 외교’ 무대가 넓어지고 있다. 국제기구 의장과 명예의 전당 헌액, 명예영사와 명예시민, 국제행사 유치 활동에 이어 외교 사절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사(特使)는 특별한 임무를 띠고 외국에 파견되는 사절이다. 대사, 공사 등이 외국에 상주하여 자국의 이익을 대표하는 외교관인 반면, 특사는 특정 현안에 한해서 해당국의 정부 혹은 정부수반을 대표해 파견된다. 특사는 새 정부가 들어선 직후 주요국을 방문해 새로 출범하는 정부의 정책 기조를 설명하고 입장을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이때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특사 외교의 시작은 '헤이그 특사'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은 1907년 고종의 밀서를 들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일제가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려 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무산됐다. 특사단 부단장 격인 부사(副使)로 파견됐던 이준 열사는 뜻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자 헤이그의 드용(De Jong) 호텔에서 순국했다.

대통령실은 주요국과의 협력 관계를 정상화하려는 차원에서 미국, 유럽연합(EU), 일본, 중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인도 등 14개국에 특사를 파견키로 했다. 그중 핵심은 단연 미국이다. 미국은 8월 1일부터 한국에 25% 상호관세를 매기기로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년에 100억 달러를 방위비 분담금으로 내라”며 압박하고 있다. 대미 특사가 한층 더 중요한 시점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미국과의 무역 협상을 위해 꾸린 대미 특사단 단장으로 박용만 전 두산그룹 회장을 임명했다. 대미 특사단장으로 선임된 박 전 회장은 2013년부터 8년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하며 미(美) 상공회의소 및 재계 인사들과 폭넓게 교류해 왔다. 한·미 친선 비영리재단인 코리아소사이어티로부터 ‘밴 플리트 상’을 2014년(개인 자격), 2020년(대한상공회의소 기관장 자격)으로 두 차례 수상하기도 했다. 박 전 회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7년 11월 방한했을 때는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자격으로 청와대 국빈 만찬에 참석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아버지인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과 함께 대(代)를 이어 국가적 행사 유치를 위해 뛰었다. 이 회장은 부회장 시절인 2022년 2030 부산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를 위한 대통령 특사로 활동했다. 이건희 선대 회장은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 회장의 네트워크는 글로벌 톱티어(일류) 수준으로 평가된다. 이 회장은 2003년 삼성전자 상무로 승진한 뒤 아버지의 해외 출장에 동행하며 본격적으로 네트워크를 쌓았다. 이 회장은 자신의 장점인 글로벌 네트워크, 빅샷(거물)들과 교류하며 쌓은 식견과 경험을 바탕으로 삼성의 미래 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 부자처럼 기인들은 전통적으로 국가적 행사 유치에 앞장섰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에 주도적으로 활동했고, 2002년 한일월드컵은 HD현대 대주주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을 중심으로, 고 최종현 SK 선대회장이 도요타 쇼이치로 게이단렌(일본경제단체연합회) 회장에게 공동 주최를 제안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은 2012년 여수엑스포 유치를 위해 뛰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부회장은 2022년 5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 참석해 민간 외교 활동을 펼쳤다. 한화솔루션 사장이 이었던 김 부회장은 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견한 ‘다보스 특사단’에 기업인으로 유일하게 참여했다.다보스포럼은 기업인·경제학자·언론인·정치인들이 모여 세계 경제를 개선하기 위한 과제를 토론하고 연구하는 회의체이다. 김 부회장은 2010년부터 매년 WEF에 참석해 글로벌 리더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러한 지속적인 활동으로 김 부회장은 2013년 다보스포럼에서 ‘영 글로벌 리더’에 선정됐다. 김 부회장 외에도 김동원 한화생명 사장은 2016년부터 , 김동선 한화갤러리아 부사장 은 2023년부터 다보스포럼을 찾고 있다.

국내 3~4세대 기업인 뿐만 아니라 전문경영인도 특사로 활동하며 ‘민간 외교관’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송호성 기아 사장은 2022년 9월 2030 부산 엑스포 유치를 위한 첫 외교부 장관 기업인 특사 자격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아프리카 3개국 찾았다. 송 사장은 각국 정부의 고위 인사, 외교·산업통상 관련 정부부처 주요 인사를 만나 부산엑스포 유치 지지를 요청했다. 현대차그룹은 2021년 8월 국내 대기업 중 가장 먼저 그룹 차원의 전담조직인 ‘부산엑스포유치지원TFT(태스크포스팀)’를 구성했다.

한국 대기업 경영자들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국가 자산이 되고 있는 것이다.세계 무대 뒤에는 국가와 기업의 이해관계가 얽힌 수많은 물밑 협상이 이뤄진다. 이 과정에서 한국 기업인들이 ‘민간 외교사절’ 역할을 해내길 기대한다.

 

[뉴스인사이드 정해균 기자 chung.9223@newsinsid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