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전 교수 별세, ‘행동하는 지성’의 생전 발자취는?
리영희 전 교수 별세, ‘행동하는 지성’의 생전 발자취는?
  • 승인 2010.12.05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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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보도화면 캡쳐

[SSTV | 이금준 인턴기자] ‘행동하는 지성’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의 별세 소식이 전해진 가운데 그의 생전 발자취를 회고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리 전 교수는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나 경성공립공업고와 한국해양대를 졸업한 후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수학했다. 이후 그는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 당시 국군 통역장교를 지냈으며 1957년 합동통신 외신부에서 언론인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1961년부터 5·16 쿠데타에 반대하는 글을 ‘뉴 리퍼블릭’에 기고했으며 1964년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외상회의, 남북한 동시유엔가입 추진’ 기사로 구속됐다 풀려났고 1965년 조선일보로 적을 옮겼다. 하지만 1969년 베트남 전쟁 파병 비판기사로 해직됐고 이후 합동통신 부장으로 시절 ‘군부독재 학원탄압 반대 64인 지식인 선언’에 참여로 인해 또 직장을 잃었다.

1972년부터 고인은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직에 임명됐지만 독재정권의 압력으로 1976부터 4년간 교수직을 박탈당하기도 했으며 복직 된 1980년 또 다시 ‘광주소요 배후조종자’로 구속됐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전환시대의 논리(1974)’, ‘우상과 이성(1977)’, ‘8억인과의 대화(1977)’, ‘베트남 전쟁(1985)’, ‘역정(1988)’ 등의 저서를 내놓았다.

1987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교환교수로 재직하다 1988년 한겨레 신문 창간과 함께 이사 겸 논설고문이 됐으나 이듬해 방북취재를 기획,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됐다가 특사로 석방됐다.

1995년 한양대에서 퇴임한 고인은 네 번의 해직과 다섯 번의 구속 등 역경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투쟁해 ‘행동하는 지성’의 모범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고 2006년 제1회 기자의혼상, 2006년 제1회 단재언론상, 2007년 제9회 한겨레통일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지병인 간경화로 서울 중랑구 면목동 녹색병원에 입원했던 고인은 5일 오전 0시 30분경 병원에서 향년 81세로 숨을 거뒀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으며 유족으로는 부인 윤영자 여사와 아들 건일, 건식, 그리고 딸 미정씨가 있다. 입관은 6일 오전 11시, 발인은 8일 오전 6시에 진행되며 수원 연화장에서 고인의 화장식이 치러질 예정이다. 아울러 장지는 국립 5·18 민주묘지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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