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D] '중견 작가' 이희현 개인전, '실낙원(Lost Paradise)'
[VOD] '중견 작가' 이희현 개인전, '실낙원(Lost Paradise)'
  • 승인 2010.03.23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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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현 개인전 실낙원 ⓒ SSTV

[영상 황예린 PD] 중견작가 이희현의 개인전 ‘실낙원’이 종로구 안국동 갤러리 담에서 지난 3월 17일부터 30일까지 열린다.

실낙원을 주제로 작업하는 이희현의 이번 전시는 7번째 개인전으로 정물과 인물, 그리고 가공된 풍경을 주로 보여주고 있다. 이희현이 추구하는 실낙원에 주된 소재가 되는 것은 낙원에 있었을 법한 사물이 아니고 화려하고 어여쁘게 피어있을 만한 것들이 시든 채로 그것도 조용한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는게 특징이다.

여기에 낯선 사물과의 조합도 조금은 어색하게 보여지기도 한다. 꽃병과 뱀과의 구성도 그렇고 꽂혀있는 꽃들도 한창때의 모습이 아닌 말라서 죽음을 눈앞에 둔 모습이다. 이러한 구체적 사물들은 실존하지만 작가의 그림에선 비현실적인 대상으로 바뀐다. 작가는 이러한 작업 속에서 떠나온 낙원을 그리고자 한다.

작가 이희현만의 독특한 색감으로 신비스런 느낌을 풍기는 이번 전시에는 작품 15점 가량이 출품되어 전시되고 있다. 30일까지 서울 종로구 안국동 갤러리 담. (02)738-2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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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현 still life4 , oil on canvas, 103x103cm , 2009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정원 가꾸기(2008). 뜨락, 정원, 꽃, 잎 넓은 나무, 동자, 피었다 시드는 잔해들이 널려있는 정물대 위의 풍경들. 이 모두는 작가의 작업실을 지키고 있는 정물대 위에 놓여진, 대개는 잠시 잠깐 생기로 반짝거리다가 이후 오랫동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정물에서 착상된 것들이다. 이 착상을 이끄는 계기는 기억이다(기억이 내 작업의 가장 큰 동기). 기억이 매개가 되어서 정물이 가지를 친다. 정물이 기억을 부르고, 기억이 다른 기억을 불러들인다. 정물이 기억으로 확장되고, 기억은 재차 정물에게로 되돌려진다. 정물과 기억이 그 경계를 허물고 서로 뒤섞이며 유기적인 덩어리를 이룬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정물이고 기억인지가 분명하지도 않고 (그 구분이) 의미도 없다.
정물이 촉발시킨 기억의 가지치기. 여기서 기억은 사유와 뒤섞인다. 순수한 기억도 없고 순수한 사유도 없다. 기억은 기억을 복원하고 재생하는 과정에 각색이 끼어들어 왜곡되고, 사유는 사유대로 이 불완전한 기억에 의존한다. 기억과 사유가 현실(작가의 경우엔 그 의미가 정물에 연동된, 즉 정물이 정박해 있는, 정물이 속해있는 현실감)과 맺고 있는 관계는 불완전(불분명)하고, 유기적이고 상호적이다. 작가의 그림에서 정물은 이처럼 그 의미와 구조가 열려 있어서 기억을 불러들이고, 사유를 불러들이고, 다른 것들을 불러들인다. 혹, 이와는 거꾸로 정물이 게워낸 것일지도 모른다(모든 사물 속엔 이미, 진즉에 완전한 형상이 들어있다). 여하튼.
정물과 기억과 사유가, 정물이 속해져 있는 현실과 정물이 불러들인 것들이 속해져 있는 시간의 자장(대개는 과거로부터 호출된, 비현실의 자장?)이 그 경계를 허물고 공존하는가 하면, 이처럼 서로 다른 계기들이 어우러지는 그림이 의식의 흐름과 자유연상작용을 불러일으킨다. 의식은 현실의 자장을 넘어 과거 속으로 흘러 넘치고, 정물은 정물대로 논리적 개연성을 넘어 정물 아닌 것에 접속된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정물대 위의 정물들은 이렇게 작가의 추억을 재생시켜주는 기억의 장이 되고, 작가의 세계관이 움트는 사유의 자궁이 된다. 뜨락과 정원. 바로, 정물에 투사된 작가의 마음 밭이다.
실낙원(2009). 잃어버린 낙원이다. 파라다이스와 유토피아, 이상향과 이상국가는 상실을 전제로 한 개념이다. 아르카디아 인 에고. 심지어 아르카디아에조차 에고, 즉 죽음, 즉 상실은 있다. 이상은 현실에 배치된다. 현실에 대한 부정의식으로부터, 보상심리로부터 이상은 움튼다. 여기가 아닌 어디라도 괜찮다는 보들레르의 독백처럼 이상은 나를 현실로부터 탈출시켜줄 수가 있을까. 이상은 현실로부터의 일탈의 계기가 될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모르긴 해도 보들레르 자신도 그 불가능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기를 그만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이상하기는 곧 꿈꾸기이기 때문이다. 이상하기, 꿈꾸기, 잠자기, 그리고 이를 통한 현실로부터의 도피와 도발과 도약을 감행할 수가 없다면 어떻게 살 수가 있을까. 아찔하다. 삶을 의미 있게 해주는 것은 정작 삶에는 없다. 삶과 삶 사이에 끼인 막간과도 같은 어떤 지점, 어떤 여백, 어떤 망각, 어떤 몽상, 의식이 느슨해지고 헐거워지는 어떤 순간, 죽음보다 깊은 잠에로의 추락 속에 있다.
몇 그루의 나무와 작은 숲, 가지런한 밭, 학교나 교회 같은 작은 건물을 품고 있는, 입술처럼 생긴 작은 섬 하나. 허허로운 화면에 달랑 섬 하나 그려놓고, 작가는 실낙원이라고 붙였다. 잃어버린 낙원, 잃어버린 섬. 작가는 현실의 섬을 그린 것이 아니라 비현실의 섬을 그린 것이며, 현실을 거울삼아 그린 것이 아니라 머리 속에 구상해낸 섬을 그린 것이며, 일상의 섬이 아니라 이상의 섬을 그린 것이다. 혹, 정물에서 착상된, 정물에서 갈래진 섬인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 속에 섬 하나씩을 간직하고 있다. 잃어버린 것들, 상실한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 해서 이런 상실감이 모여 그리움으로 증폭되는 삶의 계기들이 차곡차곡 쟁여져 있는. 섬은 물길이 가로막고 있어서 가 닿을 수가 없다. 다만, 멀리서 쳐다볼 수 있을 뿐. 그리워할 수 있을 뿐. 그림에서의 섬이 나무와 숲과 밭과 건물 등 알만한 대상들에도 불구하고 왠지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아득해 보이고,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이런 상실감과 이상향,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움을 섬에 빗대어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정원과 실낙원, 정물과 섬을 가로지르며. 사물과 사물, 사물과 공간 사이에는 공기가 있다. 사물을 생기 있게 해주는 것은 정작 사물 자체보다는, 사물과 사물 사이로 흐르는 공기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형태도 색깔도 없는 이 공기를 어떻게 붙잡는가, 여부가 (특히 작가의 그림에서) 그림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이다. 공기, 대기, 여백, 그것은 그저 물질적 개념만도 아니고 단순한 공간적 개념으로 환원되지도 않는다. 물질과 공간의 상호작용에 연유하는 그것은, 여기에 주체의 심정적 계기가 매개가 되어서 그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런 연유로 이를테면 우울한 공기, 가볍고 쾌적한 공기, 부드럽고 우호적인 공기 등등 심정적 계기와 연동된, 주체와 상호 삼투되는 다양한 공기의 질감이 가능해진다. 어쩌면 그것은 그림 속에 그려진 사물에서 발해지는 어떤 생기, 그림 자체가 암시해주는 어떤 기운, 어떤 분위기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공기, 대기, 여백은 생기, 기운, 분위기와 통한다. 작가의 그림에서 공기는 이처럼 주체와 긴밀하게 연속돼 있는 만큼, 작가의 그림을 결정짓는 특질이기도 하다.
이희현이 그린 그림에는 정물들, 인물들, 풍경들, 섬들이 등장한다. 하나같이 현실에서 취해진 소재들이며, 한눈에도 그 실체를 알만한 대상들이다. 그렇다고 서사가 유별나게 강조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평범할 수도 있는 그림들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소재들에도 불구하고 왠지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일상적인 소재들에도 불구하고 이상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희박한 서사의 표층 위로 일상적인 소회를 끌어올려 투명하고, 담담하고, 맑은 서정적 경험으로 승화시켜주는 어떤 힘이 있다. 이 모든 비전과 감각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공기며 공기의 질감이다. 공기의 질감이야말로 작가의 그림을 관류하는 핵심이며, 작가는 그 공기의 질감을 거의 동물적 감각으로 냄새 맡는다. 아마도 살갗이나 체온과 같은 느낌의 색과 톤을 표현하고 싶다는, (마치 흐르는 공기처럼) 끊임없이 유동적인 삶(존재의 양태)을 표현하고 싶다는 작가의 변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듯싶다. 작가의 그림에서 색과 톤은, 그리고 그 색과 톤에서 감지되는 유동적인 느낌은 말하자면 주체와 상호 삼투되는 공기, 주체가 투사된 심정적인 공기, 체화된 공기로 나타난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그 대상을 즉각 알아볼 수 있는 형상에도 불구하고 왠지 비현실적인 아우라로 감싸인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무슨 알 수 없는 공기라도 있어서, 그것이 사물에, 세계에, 대상에 가 닿으면서 졸지에 그 현실성을 빼앗아 비현실적으로 만들어놓는 것 같은 어떤 기운이 감지된다. 좀 과장시켜 말하자면 마치 물안개를 통해 그 뒤편의 나무나 호수 등 정경을 보는 것 같은, 어떤 베일 뒤로 사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만약 육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공기의 입자가 굵어진다면, 그 공기의 입자를 통해 사물을 볼 때, 작가의 그림에서와 같은 정경이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처럼 정경 위로 희뿌연 반투명의 막이 덮씌워진 것 같은 독특한 분위기가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를 떠올리게 한다(아우라는 분위기란 뜻이다). 먼 것의 일회적인 현상, 먼 것이 가깝게 느껴지는 경험(사실상 신의 편재성과 신의 현현을 암시하는). 거리의 문제다. 이와 관련해 특히 곧 사라질 것을 간절히 여기며, 현실적이라도 아득하게 꾸민다는 작가의 변은 의미심장하게 와 닿는다. 이 말은 곧 먼 것을 가깝게 느끼며, 반대로 가까운 것은 멀게 느껴지도록 각색하고 연출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현실인식과 느낌의 어긋남과 위반. 작가의 그림에 독특한 분위기를 부여해주는 핵심은 이처럼 느낌으로써 현실인식을 위반하는 것, 그럼으로써 선입견과 편견, 합리와 상식으로 굳어진 관성의 틀을 깨고 다른 종류의 비전을 열어 놓는 것에서 온다.
그 비전이 약간의 의외성과 약간의 낯설음을 동반한 사물의 질서에, 사물과 주체가 상호 작용하는 어떤 지점에 직면케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치 파스텔 색조처럼 투명하고 부드럽고 우호적인 사물의 살갗에, 사물과 사물 사이로 흐르는 공기의 질감에 접촉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