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인터뷰] ‘말모이’ 윤계상 “깊이를 알 수 없었던 마음”…작품을 대하는 진정성
[NI인터뷰] ‘말모이’ 윤계상 “깊이를 알 수 없었던 마음”…작품을 대하는 진정성
  • 승인 2019.01.0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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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영화 ‘범죄도시’에서 윤계상은 무자비한 신흥범죄조직 보스 장첸을 연기하며 배우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했다. 국민그룹이라 불리던 god에서 배우로 홀로서기를 시도하며 자리매김하기까지 많은 부침이 있었다. 과거 본인의 연기만으로도 벅찼던 윤계상은 함께 호흡하며 만들어가는 법을 배웠고 소중한 결실을 맺었다. 과감히 스펙트럼을 넓히며 새 시작을 알린 그의 차기작에 많은 관심이 모였고, 윤계상은 전작의 흐름을 이어가는 대신 또 다른 도전을 이어갔다.

‘택시운전사’ 각본을 쓴 엄유나 감독의 첫 연출작 ‘말모이’는 우리말 사용이 금지된 1940년대, 까막눈 판수(유해진 분)가 조선어학회 대표 정환(윤계상 분)을 만나 사전을 만드는 이야기를 담았다. 윤계상은 더욱 정제된 연기로 극의 중심을 잡아가며 관객들의 가슴을 서서히 뜨겁게 만든다.

“내용이 재밌었어요. 그때 봤던 시나리오 중에서 가장 재밌었고 (유해진) 형님이 이미 캐스팅된 상태였어요. 판수를 해진이 형으로 두고 읽었는데 너무 재밌어서 시나리오를 놓을 수 없더라고요. 이야기의 힘이 있어서 참여하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하게 됐어요.”

판수와 세 식구의 이야기, 정환이라는 캐릭터에 끌렸던 윤계상은 우리말과 정신을 지켜준 이들에 대한 감사함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끼며 작품에 임했다. 기꺼이 작품에 참여했지만 정환을 만들고 표현하는 여정은 쉽지 않았다. 전작에서 날 것의 연기를 펼쳤다면 ‘말모이’에서 윤계상은 감정을 누르고 서서히 쌓아가는 법을 택했다. 

“장첸은 사실 표현이 자유로운 역할이었어요. 사람도 막 죽이고 칼도 찌르고 행동으로 옮기는 역이라면 정환은 다 쌓아놓고 감정을 일절 닫고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었던 것 같아요. 내 슬픔과 고통을 표현하는 순간 한계치가 보이는데 그러면 안 되는 역할이라는 판단이 서더라고요. 오히려 감추면 관객들이 더 크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힘을 많이 뺏는데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조선어학회의 대표라는 중책을 맡으며 일본의 억압을 피해 말모이 사전을 만드는 정환은 까막눈인 판수를 만나며 조금씩 변해간다. 영화는 악연으로 시작된 상반된 두 사람의 만남부터 서로를 이해하고 믿음을 쌓아가며 서로를 변화시키는 순간까지 세밀하게 풀어간다. ‘소수의견’ 이후 오랜만에 유해진을 만난 윤계상은 그를 향한 무한한 믿음과 찬사를 늘어놓아 웃음을 자아냈다.

“유해진 선배는 무조건 찬양이죠(웃음). 시나리오를 볼 때도 유해진 선배를 연상하면서 봤어요. 예전에 볼 때보다 더 디테일하고 더 열심히 하시는 것 같아요. 후배로서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예요. 그냥 ‘열심히 하시네’가 아니라 ‘와, 진짜 열심히 하시네’ 같은 느낌이죠. 그 어떤 신인보다도 열심히 하세요. 존경스럽죠.”

   
 

‘말모이’를 촬영하며 우리말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졌다는 윤계상은 말을 지켜준 이들의 대한 감사함과 말의 본질적인 소중함을 느끼게 됐다. 동시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그들의 의지와 정신을 표현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고 괴로워했다.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깊이를 알 수 없는 부분이에요. 어떤 캐릭터를 맡으면 나라면 어떨까 상상하는데 ‘말모이’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부분도 있고, 그 인물이 어떤 마음을 지니고 희생하는지 말할 수는 있는데 깊이는 지금도 알 수 없는 거예요. 그게 힘들었어요. 감정을 조절해야 하는데 원고를 뺏기는 장면에서는 멈추지 않고 울었어요. 영화에는 못 썼죠(웃음). 우는 장면만 저녁에 시작해서 다음날 10시까지 촬영했어요. 모르니까 계속 찾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희망이 보이지 않던 일제강점기, 특히 민족말살정책이 시행된 1930년대 후반부터는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등 정신을 지배하려 했다. 극중 정환은 존경하던 아버지가 친일파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했다. 이러한 부자의 관계는 판수 부자와 비교되며 복잡한 감정을 자아낸다.

“그 시대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독립이 가능한 시절이 아니었던 거죠. 누구나 살면서 잘못된 판단을 하잖아요. 회피하고 싶은 마음, 힘든 환경으로 드러난 인간의 본능인 거죠. 잘못됐지만 그 시대는 누구나 그럴 수 있었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않았나 싶어요. 정환의 아버지도 부성애가 있었어요. 아들을 지키고 싶었던 사랑의 방식이 잘못된 거죠. 가족을 사랑하지만 누구에게 해를 입히면 안 된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내 자식이 죽는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요. 시나리오를 보면서 놀라웠어요. 저는 사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깊이 보는 것’ 같아요. 맥락이 펼쳐진 모습으로 맞다 틀리다 판단하기 전에 한 번 더 자세히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어요.”

‘말모이’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의 작품이 될 것 같으냐는 물음에 윤계상은 “너무 너무 자랑스러운 작품이 될 것 같다”며 웃었다. 매 작품이 끝날 때 마다 윤계상의 팬들은 그의 작품 속 캐릭터를 본 딴 피규어를 제작한다. 매일 일어나면 바로 볼 수 있는 자리에 피규어를 둔다는 그는 15년간 배우의 길을 걸으며 ‘내려놓음’을 얻었다. 한 가지에 몰두해 좁은 시야 속에서 정답이라고 오해했던 실수들을 겪어왔다. 연기를 향한 단순한 욕심이 작품을 헤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제는 역할의 의도를 살피고 선을 지키는 법을 알게 된 윤계상은 인터뷰 말미 관객에게 진정성 있는 배우로 남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

[뉴스인사이드 정찬혁 기자/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