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적은 잘 쓴 글과 잘 한 연기로 칭찬받고 싶은 게 아니에요. 어떻게 전달되고 어떤 영향을 만들어 가느냐가 중요해요.”

유아인에게는 다른 배우 혹은 또래 스타들과는 분명히 다른 지점이 있다. 그동안 그가 쏟아냈던 예민한 발언과 글에 혹자는 비난하고 다른 누군가는 지지한다. 대중의 사랑을 먹고 사는 연예인으로서 택할 수 있는 안전한 길이 아닌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자 한다. 그에게 글과 연기는 그가 가진 생각과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버닝’에 이어 ‘국가부도의 날’로 관객을 만나는 유아인은 국가적 위기를 앞둔 집단과 개인의 선택을 통해 본인을 정의하는 것은 무엇이며 어떠한 시선을 갖고 살아가야하는지 물음을 던진다.

“만족스러웠어요.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게 예술적으로든 상업적으로든 무조건 더 좋은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본질적 측면이 있잖아요. 주어진 여건에서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조화롭게 이끌어가고 결과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부분에 있어서 영화를 보고나서 걱정이 사라지고 감사한 느낌이 들었어요. 이런 국가적 위기와 소재를 다루는 영화로서 이 정도의 톤앤매너와 밸런스를 갖추고 나온 것에 대한 감사함이었던 것 같아요.”

영화의 소감을 묻는 말에 유아인은 우선적으로 만족을 표했다. 1997년 IMF 위기를 다루는 만큼 그날의 기억을 꺼내는 것이 많은 이들의 아물어가던 상처를 헤집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지만 영화적인 완성도와 예의를 갖췄다는 것이 그의 설명. 캐스팅 제안을 받을 당시 ‘버닝’을 촬영 중이던 유아인은 “책임을 나눠주는 선배가 있었고, 이런 이야기에 참여하는 것도 다시 올 수 있는 기회는 아니겠다는 마음이 있었다”며 출연 계기를 밝혔다.

영화는 국가적 위기를 감지하고 이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 분), 이러한 상황을 알지 못하는 작은 공장의 사장이자 평범한 가장 갑수(허준호 분), 국가부도의 위기를 감지하고 역베팅을 위해 투자자를 모으는 금융맨 윤정학(유아인 분), 각기 다른 세 명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작품을 선택할 때 한 가지가 절대적인 이유가 되진 않아요. 일단 이러한 형태의 이야기와 소재를 상업영화로 끌고 가고 그 주연배우가 김혜수 선배고 여성이라는 것에 신선함이 있었어요. 함께 하면서 선배가 보여준 에너지와 성실함이 저에게 큰 본보기가 되어주셨고 영감을 주셨어요. 그리고 이런 말을 하는 게 부끄럽거나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게 뱉을 수 있게 큰 감동을 주셔서 굉장히 감사한 마음이고 존경심을 갖게 됐죠. 조우진 선배는 정말 예리하고 날카로워요. 아플 정도의 선명함, 날카로움이 인상적이고 표현하시는 능력을 느꼈죠. 허준호 선배님은 배우의 존재감, 얼굴의 힘, 삶의 힘이 배역으로 전이되었을 때 가져올 수 있는 힘을 느꼈어요. 힘이라는 게 세다고 다 좋은 게 아닌데 참 적절하다고 느꼈어요. 선배님들과 작품 안에서 밸런스를 잡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재밌고 의미 있는 작업이었어요.”

‘국가부도의 날’에서 윤정학은 국가의 위기를 개인의 기회로 활용한 인물이다. 그는 비상한 통찰력으로 국가적 위기를 감지하고 투자자를 모아 역베팅에 성공한다. 금융위기로 기업들이 연쇄도산하며 많은 이들이 직장과 집을 잃고 절망에 빠져있을 때 정학의 욕망은 더욱 커지고 이와 동시에 냉소와 허망함이 그에게 스며든다. 

“어떻게 보면 얄밉고 정의롭지 못한 인물이고 현실주의자이며 기회주의자이지만 그 친구의 성질과 욕구들을 현실적으로 다가갈 수 있게 표현하고 공감대를 이룰 수 있게 염두에 두고 연기에 임했어요. 그 일로 상처를 받은 분들이 계시고 정학은 그 안에서 기회를 얻고 욕망을 추구해요. 고통과 상처, 아픔을 간직한 분들이 절대 다수라고 느껴요. 그렇기 때문에 예의 있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만듦새에 있어서 대중, 국민들에 대한 예의가 있어야 했고 그 부분에 있어서는 감독님이 큰 신뢰를 주셨어요. 이 영화의 형식이 누군가에게는 아쉬울 수 있고 짜릿한 느낌을 줄 수 없을 수도 있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가져야할 숙명에 대한 우선적 가치는 성취한 것 같아요.”

유아인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윤정학의 심리를 뜨거운 감정을 실어 표현했다. 윤정학에 대해 “다른 시각을 지니고 본질을 꿰뚫는 사람”이라고 말한 유아인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예측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투자자를 끌어 모을 때 본인의 믿음을 전하는 형태가 사이비 교주 같았다”며 뜨겁고 순간적인 감정과 에너지로 인물을 연기했다. 또한 유아인은 투자자로 분한 류덕환, 송영창과 함께 영화의 아웃사이드에서 관객들이 이야기의 본질에 진입시키고 무겁게 흘러가는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우선 우려한 건 다른 주된 이야기의 흐름이 진중해서 우리가 가져오는 가벼움과 장난들이 영화에 누가 될까봐 걱정이 있었는데 잘 녹아들고 양념으로 잘 쓰인 것 같아요. 류덕환 씨와 송영창 선배님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외롭지 않게 재밌게 촬영해서 두 분께 감사한 마음입니다. 송영창 선배님은 이번에 세 번째 만남이에요. ‘깡철이’에선 친구 아버지, ‘베테랑’에서는 친아버지로 나왔고 이번에는 투자자죠. 이 흐름이 재미있다고 생각했어요. 류덕환 씨는 꼭 만나고 싶었어요. 동생이지만 선배인데 제가 갓 데뷔했던 시절 부러워했고 배우의 흐름을 제시해줬던 좋은 배우예요. 이미 팬들과 미디어의 각광이 아닌 배우로서 두각을 드러내고 감동을 준 배우였죠. ‘천하장사 마돈나’를 보고 자극도 받고 영감도 얻어서 꼭 만나고 싶었어요.”

영화에서 윤정학은 희망적인 정부의 입장과 언론의 보도가 나올 때마다 ‘속지 않는다’고 되뇐다. 윤정학은 끝까지 외부에 흔들리지 않고 본인의 소신을 지켜나가고 욕망을 성취한다. 스크린 속 윤정학과 스크린 밖 유아인은 나를 결정하고 정의하는 가치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구제금융에 관해서는 명과 암이 있는데 결국 우리가 이야기하는 건 부정이나 긍정의 표현이 아니라 ‘잘 알자’라는 거예요. 국가의 주인인 국민에게 충분하고 선명한 정보를 전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이야기, 국민들이 가져야하는 삶의 자세에 관해 환기시키는 영화적 메시지 정도로 받아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앞서 지난 정권을 날카롭게 비난하는 영화도,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작품도 많은데 저희 영화의 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나를 결정하고 정의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게 아닐까 싶어요.”

[뉴스인사이드 정찬혁 기자/ 사진= UAA, 김재훈 포토그래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