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인터뷰] ‘변산’ 박정민, 이야기를 전달하는 심상치 않은 배우
[NI인터뷰] ‘변산’ 박정민, 이야기를 전달하는 심상치 않은 배우
  • 승인 2018.07.0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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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민은 심상치 않은 배우다. ‘파수꾼’으로 충무로에 얼굴을 알린 그는 작은 배역을 맡아도 왠지 시선이 가는 배우였다. 그런 그가 이준익 감독을 만나 ‘동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해 각종 시상식에서 상을 휩쓴 박정민은 도전에 도전을 거듭하며 궤도에 올랐다. 

‘동주’ 이후 2년, 박정민은 다시 이준익 감독을 만나 ‘변산’으로 원톱 주연의 자리를 꿰찼다. 그는 사투리를 연습하고 랩 가사도 직접 썼다. 심지어 홍보 뮤직비디오까지 기획하며 ‘만능 배우’의 진가를 발휘했다. 

‘변산’에서 박정민은 짝사랑 선미(김고은 분)의 꼼수로 흑역사 가득한 고향 변산에 강제 소환된 빡센 청춘 학수 역을 맡았다. 학수는 지긋지긋한 고향 변산을 떠나 상경해 랩 서바이벌프로그램 ‘쇼 미 더 머니’에 6년째 참가 중인 무명 래퍼다. 랩에 사투리 억양이 있는 것 같다는 심사위원의 지적에 서울 태생이라며 고향을 부정한다. 그는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고시원 쪽방에서 랩 가사를 쓴다. 어느 날 우연히 고향친구를 만난 그는 병원으로부터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는다. 애써 부정해왔던 고향과 아버지, 돌아보고 싶지 않았던 것들에게 그는 돌아간다.

“실제 제 모습과 비슷하죠. 제가 연기한 것 중에 ‘박정민’을 많이 끌어온 캐릭터이긴 해요. 학수라는 사람은 동떨어진 인간처럼 보였으면 했어요. 고향에서도 사람에서도 동떨어져 있는 인물, 함께 있지만 함께 있지 않은 사람 같은 거죠. 저는 아버지한테 다정다감하게 말 해본 적 없고 아버지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살아와서 학수에 저를 대입 한 것들이 있어요. 물론 학수가 아버지에게 하는 행동이나 말투가 더 심하긴 한데(웃음) 아버지와 아들의 감정은 늘 물렁물렁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 걸 보여줬어야 했죠.”

이준익 감독의 전작 ‘동주’, ‘박열’에서 시가 나왔다면 ‘변산’에는 랩이 청춘을 대변하는 매개체로 등장한다. 무명 래퍼 학수를 연기한 박정민은 1여년간을 랩 연습에 몰입했고 직접 가사를 쓰고 랩을 했다. 아무리 연기라고 하지만 랩이 어색하다면 기본적인 설정에서부터 설득력이 떨어진다. 우려 속에 공개된 극 중 랩 장면은 전문 래퍼에겐 부족함이 보일 수 있지만 일반 관객이 보기엔 충분을 넘어선 설득력과 완성도를 갖췄다.

“랩은 창피하죠. 숨고 싶어요. 무슨 말을 못하겠어요. 어쨌든 저는 배우잖아요. 관객들이 저를 배우로 인식하고 극장에 들어오시잖아요. 그래서 설득 자체가 래퍼가 랩을 하는 게 아닌 배우가 래퍼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시작하게 되죠. 만약 제가 랩을 엄청 잘했어도 ‘박정민 랩 잘하네’라고 접근하지 ‘저 래퍼 누구야’는 아니잖아요.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엄청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오히려 줄이고 영화에서 제 역할에 집중하는 게 맞겠다 싶어서 가사를 열심히 썼어요. 음악도 많이 듣고 외국 힙합도 듣고 얀키 형도 자주 만났죠.”

   
 

영화에서 랩은 단순한 소재를 넘어서 학수의 심리를 대변하고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학수를 둘러싼 다양한 에피소드는 학수의 랩 가사에 녹아들며 자연스럽게 장면과 장면을 연결한다. 당초 예정보다 곡이 늘어나면서 박정민은 촬영을 마친 후에도 랩 가사를 쓰고 준비해야 했다. 이미 산문집 ‘쓸 만한 인간’을 출판하며 필력을 인정받은 그는 랩으로 관객과 영화를 연결해냈다.  

“예정보다 한 두곡 정도가 늘었어요. 감독님과 저희들은 학수의 마음을 알고 촬영하고 연기했지만 관객에게 드러나지 않는다면 이야기가 잘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학수의 마음을 랩으로 친절하게 설명하기로 결정했죠. 촬영 마치고 한 달 반인가 지나서 갑자기 다시 가사를 써야하는 상황이 돼서 스트레스 많이 받았어요(웃음).”

‘변산’으로 호흡을 맞춘 김고은과 박정민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선후배 사이다. 평소 친분이 있지만 한 작품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다. 박정민이 현장에서 만난 김고은은 모두를 아우르는 배우였다. 박정민은 주연으로서 본인이 짊어져야 했던 짐을 덜어준 김고은에게 연거푸 고마움을 표했다.

“김고은은 어른이었어요. 연기는 뭐 말할 것도 없죠. 현장에서 행복해 하는 게 눈에 보였어요. 좋아하더라고요. 연기하면서 더 편했고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선 ‘포텐이 터지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사실 제가 현장에서 분위기도 띄우고 배우, 스태프도 챙겨야 했는데 고은이가 잘 해줘서 많이 의지가 됐고 너무 고마웠죠. 처음에는 영화가 오랜만이라 긴장된다고 그랬어요. 생각해보니 드라마를 연속으로 두 편 찍어서 영화는 오래만이더라고요. 그래서 긴장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는데 다 죽여 버렸어요(웃음).” 

1년의 랩 연습, 작사에 사투리 연습까지. 고된 미션의 연속이었던 ‘변산’에 참여하게 된 건 이준익 감독의 “랩 잘하냐?”라는 한 마디로부터다. 이준익 감독은 ‘변산’을 준비하며 박정민을 떠올렸고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감독에 대한 믿음으로 시작한 ‘변산’에서 박정민은 다시 한 번 이준익 감독에게 매료됐다.

“이번에는 영화 분위기도 분위기인지라 훨씬 편했어요. ‘동주’ 때는 숙연한 장면도 많았어요. 이번에는 마음껏 노는 영화니까 훨씬 편했고 감독님과도 더 친해질 수 있었죠. 한 번 더 감독님께 반하는 계기가 됐어요. 저와 취향은 좀 다른데 성향이 비슷해요. 그래서 재밌죠. 감독님은 나이가 있으시니 분명 젊은 감각은 아니에요. 듣다보면 아재 같을 때가 있는데 그걸 본인도 아세요(웃음). 감독님은 젊은 세대의 것들을 수용하시고 항상 열린 자세로 계세요. ‘그건 아니야’라는 말보다는 ‘너희가 맞는 거니까 그렇게 하자’라고 하세요. 늘 그러실 순 없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상대방이 아는 부분이 있으면 인정하고 끌어다 쓰시는 분이죠.”

극 중 학수는 학창시절 미경(신현빈 분)을 좋아했지만 고백은 번번이 실패했다. 심지어 장소를 착각해 다른 사람에게 고백하는 실수도 저지른다.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는 흑역사 가득한 고향에 돌아온 학수는 선미를 통해 자신의 과거와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박정민에게 본인의 흑역사를 마주 할 수 있는지 묻자 곧바로 “그럴 수 없다”는 답변이 나와 웃음을 자아냈다.

“흑역사는 마주할 수 없어요(웃음).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무에게도 말 못할 나 혼자만 혹은 두 사람만 아는 흑역사는 없던 일로 하고 묻어두고 사는 거죠. 그러다가 문득 갑자기 확 떠오르면 ‘아, 아니야~’이러면서 다시 묻어두고, 그런 것들의 연속이죠. 학수가 흑역사를 정면으로 돌파할 수 있었던 건 선미가 있었고 아버지가 원했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저의 흑역사는 아무도 그걸 원하지 않아요(웃음). 묻어두고 살아야죠.”

   
 

선미는 학수에게 “값나가게 살진 못해도 후지게 살지는 말어”라고 일갈한다. 모두가 값어치 있는 삶을 살고자 하지만 이를 좇다보면 어느새 그러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대중들에게 자주 노출되고 많은 것들이 포장되는 배우의 삶을 살아가는 박정민 역시 스스로 ‘나는 후지게 살고 있나’ 질문을 던졌다. 

“배우라는 직업뿐만 아니라 모두가 자기포장을 하고 살아가잖아요. 배우는 그 포장지가 더 화려하고 사람들에게 잘 드러나는 거고. 가끔은 너무 거짓말하면서 산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누군가 ‘박정민 그럴듯하게 사네’라고 하면 속으로 ‘나 너무 구리다’ 싶어요. 최대한 솔직하게 살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잖아요. 아니면 그럴싸하게 바꿔 말해야 하는 것들도 있고. 그런 것들이 가끔 괴롭힐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제 자신이 ‘후지게’ 보이는 거죠.”

캐릭터에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이는 과정에서 배우는 본능적으로 욕심을 낼 수밖에 없다. 누구보다 세밀하게 캐릭터를 분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한 욕심은 캐릭터를 화려하게 만들고 연기를 돋보이게 만들 수는 있지만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는 독이 된다. 박정민은 뺄셈을 잘하는 배우다. 그에게는 캐릭터의 화려한 장신구를 내려놓고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있다.

“저는 무언가 과하게 넣으려 안 해요. 사람 자체가 표현을 잘 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잘 못해요. 제가 못해서 안 하는 것도 있는데 어떤 장르에선 그런 것들이 필요할 때가 있죠. 어쨌든 전체적으로 보면 많은 걸 넣기보다는 상대배우와의 호흡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이 좋다고 생각해요. 물론 쉽지 않죠. 제가 모르는 감정을 연기할 때가 가장 어려워요. 어떠한 신에서 인물의 행동과 말에 설득되지 않을 때 꼼수를 쓰게 되는 거죠. 그런 순간이 아직 잦게 오는 것 같아요. 선배님들한테 ‘선배님은 어느 경지까지 오셨나요’라고 묻지 않으니 다른 분들은 모르겠어요. 저는 선배들 연기를 보면 너무 존경스러워요. 저기까지 가려면 아직 너무 멀었다는 생각이 들죠.”

원톱 주연을 맡고 1년 동안 랩을 연습하고 가사를 쓰고 홍보 영상까지 만들었다. 그에게 ‘변산’은 한마디로 ‘애증의 영화’다. 홍보를 위해 예정 외 게릴라 무대인사까지 불사하겠다는 그는 어느 때보다 강한 애정과 증오(?)를 반복하며 ‘변산’을 바라보고 있다.

“이 영화를 위해 1년을 투자했어요. 그 사이에 두 작품 촬영이 끝났고 두 작품이 개봉했어요. 그런데 저는 아직도 ‘변산’을 붙들고 살고 있어요. 애증의 영화죠. 너무 짜증나는데 가장 사랑하는 영화가 될 것 같아요. 이렇게까지 될지 몰랐어요. 정말 투자자처럼 홍보하고 다녀요. 그래서 집에 들어가면 더 우울해지는 것도 있어요. 한창 밖에서 떠들고 집에 들어가면 한숨을 내쉬죠. 기복이 거의 학수 급이에요(웃음).”

[뉴스인사이드 정찬혁 기자/ 사진=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