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인터뷰] ‘남한산성’ 화려함보다 묵직함 선택한 이병헌…“이렇게 무거운 슬픔 있을까”
[NI인터뷰] ‘남한산성’ 화려함보다 묵직함 선택한 이병헌…“이렇게 무거운 슬픔 있을까”
  • 승인 2017.10.04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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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보는 배우’라는 수식어만큼 이병헌에게 어울리는 수식어는 없다. ‘이병헌’이라는 브랜드는 과거도 현재도 충무로에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한국영화의 선봉에 있지만 이미지가 소진되거나 장르가 획일화될 만한 시기를 기가 막히게 비켜간다. 매 작품 새로운 인물을 덧칠해가는 그가 이번에는 비통함이 서려있는 충신의 눈빛을 스크린에 옮겼다.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남한산성’은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조선의 운명이 걸린 47일간의 남한산성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병헌은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로 분해 김상헌(김윤석 분)과 물러섬 없는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간다.

“영화를 보고나서 감독이 똑똑한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제작비도 많이 들어갔고 다양한 요소들로 흔들릴 수 있는데 자신의 소신을 덤덤하고 차분하게 잘 쌓아올린 것 같아요. ‘남한산성’이라는 영화만의 색과 감성이 생겼어요.”

‘남한산성 이전에 이병헌은 ‘광해, 왕이 된 남자’, ‘협녀, 칼의 기억’를 통해 사극연기를 선보인 바 있다. ‘광해’와 ‘협녀’ 모두 일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했거나 새롭게 창조된 이야기로 정통사극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전에 했던 사극과는 다른 점은 감독이 고친 부분들이 있지만 대부분을 실제 역사에서 가져왔다는 거예요. 처음에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드라마틱한 이야기에 매료됐어요. 그리고 여러 형태의 슬픈 영화들이 있지만 이렇게 무거운 슬픔이 있을까 싶었죠. 묵직하고 큰 슬픔을 지닌 작품이라 생각했어요. 그리고 주관적이지만 독특한 형태의 시나리오라고 생각했어요. 보통은 인물에 감정이입해서 극을 따라가는데 이건 어느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못할 것 같은 영화였어요. 이 영화의 문제점일수도 있고 가장 큰 매력일수도 있어요. 관객이 누군가의 감정을 따라가고 정의의 편에 서거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는 없는 거죠.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서로가 너무나 맞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누가 옳은지를 말하는 영화는 아니에요.”

   
 

‘남한산성’은 대규모의 자본이 들어간 상업영화임에도 기존 영화들의 흥행코드를 답습하지 않는다. 영웅의 서사도 관객들을 현혹시킬 스펙터클도 승리의 카타르시스도 없다. 획일화되어 가고 있다는 한국영화를 향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병헌은 ‘남한산성’이 이러한 갈증을 해소시킬 영화가 되길 바란다.

“다양성으로 다가갔으면 좋겠어요. 어쩌면 화려하고 요란했던 상업영화에 지친 분들도 계실 거예요. 그리고 이런 묵직한 슬픔을 좋아하시는 분들도 계실 거고요.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역사를 공부하는 측면도 있을 수 있죠. 여러모로 한국 영화의 다양성에 불만을 갖고 계시던 관객입장에서 좋을 것 같아요.”

‘남한산성’은 패배의 역사를 그린다. 그래서 영화는 다소 무겁고 그 안의 인물들 역시 비통한 정서가 서려있다. 감독과 배우들은 영화를 관통하는 비통함을 중심에 두고 감정의 결을 세밀하게 가다듬으며 종국을 향해 달렸다. 

“47일간의 남한산성은 모두에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시간이었어요. 그 시간 동안 어느 누구도 비통함을 잊고 지낼 수 없을 거예요. 그래서 항상 얼굴이 슬퍼 보이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명길의 속에 있는 주된 감정은 비통함이 아니었을까요. 영화 속에서 슬픈 장면을 몇 있는데 편집됐어요. 그 신 자체는 정말 좋았는데 영화에 넣을 것인지 마지막 감정을 효과적으로 살리기 위해 뺄 것인지 고민이 있었죠. 명길이 서찰을 읽는 장면이 있었어요. 그리고 상헌과 대립하는 장면에서 감정을 터트리는 버전도 있었는데 전체적인 밸런스를 위해 지금의 장면이 들어갔죠.”

   
 

‘남한산성’의 곳곳에는 원작의 문장들이 재현된다. 김훈 작가의 묵직한 문장들은 이병헌의 음성과 연기를 매개로 새로운 힘을 얻는다. 

“대사가 생경한 단어들도 있고. 어미처리도 정통사극이기 때문에 고어체가 많았죠. 요즘 관객들에게 쉽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대사를 사용할지 당시 느낌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작가님의 좋은 글을 살릴지는 감독의 선택 문제였어요. 감독님은 후자를 택했죠. 저도 그 편이 훨씬 더 말의 맛을 살렸다고 생각해요. 이상하게 처음 들어보는 단어인데도 한 문장으로 만들어서 대사를 하면 의미가 전달되는 묘한 힘이 있었어요.”

영화 속에서 이병현과 김윤석, 두 배우가 주고받는 대사 한마디 한마디는 어떤 액션보다 치열하다. ‘남한산성’을 통해 처음 만난 두 배우는 어느 때보다 강렬한 시너지를 발휘한다.

“김윤석씨의 전작을 봤을 때 불같은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굉장히 불같은 배우였어요. 촬영 외적으로는 농담도 잘하고 말도 많이 하는 동네 형 같은 느낌이에요. 그런 게 의외였죠. 같은 배우라도 만나지 못하면 작품을 통해 예상하니 워낙 센 작품이 많아 무섭고 까칠하진 않을까 싶은 선입견이 있었어요. 만나보니 동네 형처럼 편안하더라고요.”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이병헌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빈틈없이 채웠다. 국내는 물론 할리우드까지 진출하며 저변을 넓혀갔다.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의 촬영을 마쳤고, 오랜만에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을 통해 브라운관 복귀도 앞두고 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계속 보여요. 얼마 전에도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예전에는 일본 드라마가 최고 인기였던 시절이 있었고 홍콩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할 때가 있었어요. 지금은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그런 이야기를 들어요. 평소에 체감하지 못하다가 해외 나가면 우리 영화가 정말 좋고 다르다는 걸 느껴요. 예전엔 왕가위 감독의 작품을 보며 홍콩 배우가 부러웠는데 지금은 그들이 우리를 부러워하는 시기가 아닐까 싶어요. 이런 고마움을 모르고 있었나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뉴스인사이드 정찬혁 기자/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