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세계의 명화] ‘제로 법칙의 비밀’ 어차피 우주도, 삶도 끝내 0에 수렴하고 말 것이라면… 크리스토프 왈츠, 맷 데이먼
[EBS-세계의 명화] ‘제로 법칙의 비밀’ 어차피 우주도, 삶도 끝내 0에 수렴하고 말 것이라면… 크리스토프 왈츠, 맷 데이먼
  • 승인 2017.06.17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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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BS-세계의 명화] ‘제로 법칙의 비밀’ 어차피 우주도, 삶도 끝내 0에 수렴하고 말 것이라면… 크리스토프 왈츠, 맷 데이먼

방송: 2017년 6월 17일(토) 밤 10시 55분

부제: 제로 법칙의 비밀

원제: The Zero Theorem

 

감독: 테리 길리엄

출연: 크리스토프 왈츠, 맷 데이먼, 멜라니 티에리, 데이비드 듈리스, 루카스 헤지스

제작: 2013년 / 미국, 루마니아, 영국

방송길이: 106분

나이등급: 15세

 

줄거리:

컴퓨터 천재 코언 레스(크리스토프 왈츠)는 정보를 수집하는 컴퓨터 회사 맨컴에서 일하며 매일 같은 하루를 보낸다. 모종의 연산 작업을 반복하는 그는 자신이 일하는 방식이 헛되다고 느낀다. 어느 날 걸려온, 인생의 비밀을 알려주는 중요한 전화를 실수로 끊어버렸다는 자책감도 그를 옥죄고 있다. 코언은 전화가 다시 걸려오기만을 기다린다. 출퇴근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 코언은 관리인 조비(데이비드 듈리스)에게 재택 근무를 요청하지만, 조비는 이런저런 이유로 그의 요청을 묵살한다. 코언은 신체 장애를 핑계 대보기도 하지만 담당 의사(벤 위쇼)는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다고 진단한다. 답답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일하던 그는 파티에서 우연히 맨컴 회장(맷 데이먼)을 만나 재택 근무를 청한다. 회장은 비밀의 제로법칙 프로젝트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조건으로 그의 재택 근무 신청을 허가한다. 코언은 집에서 회사가 파견한 상담 전문가 쉬링크-롬(틸다 스윈튼)의 조언을 받으며 프로젝트에 임한다. 0에 수렴하는 수식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일이다. 자신이 어느 정도 일을 잘한다고 생각했던 코언은 점점 업무 압박에 시달리고, 그러던 중 회장 아들 밥(루카스 헤지스)이 나타나 약간이나마 코언의 숨통이 트이도록 해준다. 처음엔 코언을 격려하기 위해 등장한 창녀 베인슬리(멜라니 티에리)도 생의 공허감에 시달리는 코언의 고뇌를 알고난 뒤 그의 정신적 돌파구가 돼 준다. 시간이 흐를수록 코언은 자신의 일과 삶에 실존적 회의를 느낀다. 밥과 베인슬리는 코언에게 집을 벗어나라고 종용하지만 코언은 혼란스러워 할뿐이다. 그리고 코언은 다시 만난 맨컴 회장으로부터 뜻밖에도 충격적인 진실을 전해 듣는다.

 

주제:

맨컴 회장의 '제로법칙'은 무한히 팽창한 거대한 우주도 우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뿐이며, 결국 그 우주조차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제로가 된다는 법칙이다. 코언은 수많은 연산으로 이루어진 가상 세계에서 제로법칙에 수렴하는 연산들을 찾아내는 일을 한다. 어차피 우주도, 삶도 끝내 0에 수렴하고 말 것이라면 현재의 모든 행위에 무슨 의미를 담을 수 있을까. 코언의 고뇌도 이러한 것이다. 감독 테리 길리엄은 화려한 미술적 혼돈으로 관객의 눈을 현혹하지만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생의 무상함이다. 하지만 삶의 비밀, 생의 의미는 법칙을 풀어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완성하는 것임을 밥과 베인슬리가 일깨운다. 밥은 정신적 혼돈과 육체의 고통 가운데서도 본인의 취향과 의지를 고수하며, 베인슬리는 비천한 자리에 있지만 일말의 인간성과 교감하려 노력하다 마침내 자의로 도시를 벗어난다. 어차피 모든 인간의 삶은 죽음을 향해가는 것, '제로법칙'을 통해 은유하는 바다. 하지만 테리 길리엄은 생의 존재론적 허무를 채우는 것은 그 여정에서 스스로 아름다움과 활력을 찾으려는 인간의 의지임을 말하고 있다.

 

감상 포인트:

한때 할리우드 최고의 비주얼리스트였던 테리 길리엄에게 ‘제로법칙의 비밀’과 같은 망상 가득한 SF는 무척 자연스러운 행보다. 기괴한 수공예의 달인이었던 그가 한동안 CG 특수효과의 세계를 유랑하다 다시 아날로그 미술로 돌아온 점이 눈에 띈다. 누군가는 조악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시각효과는 그의 초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스 신화와 기독교적 모티프를 일부 사용했다. 시각효과에서 드러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강박도 여전하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테리 길리엄은 그의 미술팀에게 독일의 화가 네오 라우흐의 커리어를 참고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구 동독에서 성장한 네오 라우흐는 사회 사실주의와 초현실주의에 깊이 영향 받았으며 그가 자라는 동안 숱하게 접했을, 실패한 공산체제의 어둠 그리고 냉전 종식으로 인한 서구 자본주의의 혼란을 작품에 담았다. 테리 길리엄이 창조한 비틀린 세계의 비주얼은 네오 라우흐로부터 그리 멀리 있지 않다. 펑키한 도시 비주얼은 루마니아 거리에서 촬영됐다. 영화 속에 스쳐 지나가는 숱한 인물들이 대중이 충분히 알 법한 배우들이란 사실도 재미있다. 틸다 스윈튼은 그의 여타 필모그래피에서 그래왔듯 이번에도 괴이쩍은 분장을 하고선 코언의 모니터 속 상담사로 출연한다. 벤 위쇼는 무심하고도 성실한 의사로 반짝 등장한다.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거리의 광고판에선 TV시리즈 ‘왕좌의 게임’ 시리즈로 얼굴을 알린 그웬돌린 크리스티, 패션모델 릴리 콜, TV시리즈 ‘홈랜드’의 루퍼트 프렌드, 뮤지션 레이 쿠퍼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 틸다 스윈튼과 벤 위쇼는 그들의 출연 장면을 단 하루 만에 모두 찍고 갔다고 한다.

 

감독: 테리 길리엄

1940년, 미국 미네소타 미네아폴리스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선 정치학을 전공했고 졸업 직후 잡지 카투니스트로 일했다. 얼마 뒤 영국으로 건너가서는 TV쇼 작가로 활동했고, 그때 만난 동료들과 공동 제작한 TV쇼 ‘몬티 파이튼’(1969)이 대히트를 치며 이름을 알렸다. 자연히 ‘몬티 파이튼’ 시리즈는 ‘몬티 파이튼 - 완전히 다른 것을 위하여’(1971) 등 영화로도 제작됐다. ‘몬티 파이튼의 성배’(1975)는 테리 길리엄의 영화 연출 데뷔작이다. 루이스 캐롤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시 '재버워키'를 모티프로 한 잔혹 코미디 ‘자버워키’(1977), 로빈 후드, 나폴레옹 등의 유명 인사들을 차례로 만나게 되는 소년의 여정을 그린 ‘시간 도둑들’(1981) 등 초기엔 귀여운 상상력과 손때 묻은 특수효과가 주가 되는 작품들을 만들었다. 상상력만큼 연출력도 뛰어남을 인정받게 된 계기는 조지 오웰의 ‘1984’를 변주한 ‘브라질’(1985)일 것이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그의 관심사, 미래적 기계 사회에서 환상을 통해 삶의 일탈을 찾는 소심한 인간의 연대기는 이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바론의 대모험’(1988)도 비주얼리스트로서의 그의 야심을 쏟아 부은 역작이었으나 흥행에는 크게 실패했다. 뉴욕을 헤매는 광기 어린 철학자의 드라마 ‘피셔킹’(1991), 현재의 지구를 구하고자 미래에서 날아온 죄수의 모험담을 담은 ‘12 몽키즈’(1995), 사이키델릭한 악마적 취향의 컬트무비 ‘라스베가스에서의 공포와 혐오’(1998) 등의 이후 작품들은 평단의 호평을 부르며 그를 작가로 인정받게 했다. 어쩌면 그의 정점은 여기까지였는지 모른다. 2000년대를 지나면서는 점진적으로 하락세를 타고 있다. 테리 길리엄이 당시 준비하던 신작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불의의 사고 등으로 인해 제작단계부터 망조를 비쳤고, 결국 테리 길리엄은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를 말아먹는 과정을 다큐로 담은 '웃픈' 작품, ‘라 만차’를 내놓는다. 그 뒤에 만든 ‘그림 형제: 마르바덴 숲의 전설’(2005)은 전형적인 할리우드용 블록버스터였고, 미친 부모 밑에서 자란 소녀의 그로테스크한 성장담인 ‘타이드랜드’(2005)는 자아도취의 벽을 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히스 레저의 유작으로도 잘 알려진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2009)은 환상에 대한 애정과 뚝심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지만, 역시나 서사적 빈곤을 메우지는 못했다. 그리고 최근 테리 길리엄은 지난날 만들지 못했던 야심작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를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다시 만들겠노라 공표했다.

[스타서울TV 이현지 기자/사진=EBS]